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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이즈 어프레이드

Category
diary
Date
2023.07.10
By
Baam

언택트 톡을 다녀와서 쓰는 글.
영화 한 편만 이야기하기 위해 포스팅하던 때는 오래전에 끝났는데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취향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 취향에 맞는다는 게 이거 제발 봐주세요!라고 추천할만하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티탄을 누구한테 추천하기 힘들었던 것처럼 이것도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릴 만하고, 러닝타임 3시간을 감당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라는 제목은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와 '아이 킬드 마이 마더'에 이은 무성의한 국내 개봉 제목이기 때문에 아래부터는 '이번 작'으로 지칭한다. 스포는 아마 없지만 대략적인 플롯 언급은 있음

나는 원래 아리 애스터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미드소마도 별로였고 공포영화를 즐기지 않아서 유전을 최근까지 안 보고 있다가, 감독 전작은 토크 중에 무조건 이야기하는 부분이라 이번 기회에 보고 갔다. 작품들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상징물이나 특징이 있어서 유전을 보고 가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악마니 뭐니 하는 서양 오컬트에 면역이 있는 한국인으로서 그다지 무섭지는 않았고, 곧 윈체스터 형제들이 퇴마하러 가정방문하겠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자기 전에 본 건 실수였는지 꿈에 나옴.
아무튼 그래서 줄거리가 마음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이번 작을 보게 됐다. 그리고 아무리 감독 전작들이 내 취향이 아니었더라도 전작만으로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최근에 이동진이 블로그에 썼던 글에서 개인적인 소재 선호도나 전공이 작품을 좋게 평가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고 했는데, 평론가가 아닌 일개 관객인 우리는 개인적인 경험이 평가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고 그게 전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배우 하나 때문에 별점 한 개짜리 영화의 별점 반 개를 올려 준 적 다들 있지 않을까? 나에게 이번 작이 좋았던 것도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 때문인 이유가 크다. 물론 그 이전에 일반적인 전개 방식에서 벗어나서 의식의 흐름이나 꿈처럼 한 치 앞을 모르겠는 영화를 정말 좋아하다 보니 순수하게 장르적으로 너무 재밌기도 했다.

아리 애스터가 이번 작은 지극히 유대교적인 이야기라고 말했듯이 어머니에 비유되는 신과 신에게 근원을 알 수 없는 죄책감을 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은유를 하고 있고, 신이 정한 운명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으로도 볼 수 있다. 이니셰린의 밴시 gv에서, 아일랜드 역사에 대한 은유를 감독이 분명히 의도했겠지만 그렇게만 보면 여러 방면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작품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게 되어버린다고 했던 해설이 기억난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로 나는 은유를 떠나서 아들과 엄마에 대한 이야기 자체에 집중해서 보게 된다. 영화를 보는 방식에 있어서 가장 표면적이고 단순한 접근이지만 어차피 다른 해설은 이동진이 해줄 거다.

이전 글에서 '오은영 부재의 시대에 성장기를 보낸'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통제적이고 과보호하는 등 정서적이거나 신체적인 폭력이 있던 부모에게서 자란 사람이라면 놀랍게도 주인공 보의 심리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엄마는 방문을 닫거나 잠그지 못하게 했고, 내가 다치는 일이 있으면 내 잘못이 아니더라도 부주의한 내 탓을 하며 화부터 내는 분이셨다. 이것만으로 모든 게 설명될 것 같지는 않지만 그 이상의 어릴 적 트라우마는 이 블로그가 아닌 테라피스트 앞에서 할만한 이야기다. 지금은 엄마와 사이가 정말 좋고 엄마도 양육 방식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지만,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문득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로 충격적인 기억들이 앞으로 살면서 무덤덤해질지는 모르겠다.

보는 엄마를 미워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의존하는 양가적 감정을 느끼는데, 나 또한 그런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지만(물론 보의 엄마인 모나만큼 극단적이진 않았다) 엄마를 사랑하기에 그 오묘한 심리가 이해되었다.
끝없이 도망치는 상황에서는 보의 회피 성향이 드러난다. 모나가 보에게 너는 언제나 회피하기만 했다며 모든 걸 보의 탓으로 돌리는데 이게 정말 그의 잘못일까? 부모의 잘못된 양육 태도는 성격 장애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그렇게 기계처럼 시키는 대로 살아온 사람은 능동적인 결정이 필요한 순간에 어쩔 줄 몰라 하거나 회피성이 강한 사람이 되기 쉽다. 웃기게도 보를 변호하는 글이 되어가고 있지만 나는 정말로 보에게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부모님은 그 세대가 많이 그러했듯 진로에 있어서 본인들 뜻에 반하는 다른 길은 생각도 못 하게 하는 분들이셨고 나는 지금도 종종 그때 가지 않은 길을 갔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한다. 이 아무짝에 도움 안 되는 생각은 어쩌면 남 탓일 뿐이라 내가 부모를 이기기엔 모자랐다는 결론으로 끝맺고 마는데, 중반부 연극 파트에서 자기가 살지 않은 삶을 체험하는 보를 볼 때 그런 기억이 떠올랐다.
후반부에서 죄책감에 휩싸인 보는, 한없이 높은 기준으로 자기 검열을 계속하고 그래서 내 탓이 없었냐고 물으며 끊임없이 재판대 위에 오르는 내 모습 같다.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를 때면 그래 나도 뭐 좋은 딸은 아니었잖아,라는 생각으로 끝난다. 하지만 좋은 딸이란 뭘까? 어떤 드라마에서(사실 슈내 얘기임) 부모에게 트라우마가 있는 캐릭터가 했던 대사가 있다. 애는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주는 밥만 먹으면서 마음 아프게 하는 게 원래 애들이라고.

아리 애스터가 우리를 정신병 체험으로 괴롭게 하려고 이 영화를 찍지는 않았을 거라고 말하고 싶다.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감정이 승화되는 긍정적인 감상을 한 사람으로서, 일평생을 건강한 정신으로 살았으면 이렇게까지 공감하기 힘들었을 것 같아서 이 작품이 만 오천 원짜리 정신병 판독기라는 후기가 이해 안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작품에서 묘사되는 정신적 문제와 트라우마를 우리 사회가 늘 그랬듯이 멀쩡한 사람이라면 이해해서는 안 될, 거리를 두고 터부시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긴다면 안타까울 것 같다.

창작자는 자전적인 이야기를 창작물에 담는 경향이 있다(물론 아리 애스터는 가족과 사이가 좋지만). 죄책감의 테마에 대한 질문에 아리 애스터가 사람은 근원을 찾을 수 없는 죄책감을 가지고 사는 것 같다고 한 답변을 보면, 어쩌면 회피형이라는 주인공의 성격도 감독 본인에게 있던 어느 정도의 성향을 영화를 통해 과장해서 표현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는 아리 애스터의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형제가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해석도 흥미롭다.

아리 애스터는 영화를 아주 직관적으로(양수에서 시작해서 양수로 돌아가는)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난해하다고 해서 놀랐다고 한다. 물론 자기가 만들었으니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나도 감독 의견에 동의한다.
그리고 어떤 영화든 꼭 뭐가 정답이라고 결론지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모든 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마음을 가지면 편하게 볼 수 있다. 특정 시점 이후부터는 보의 악몽이라든지, 아니면 보가 실제로 경험한 사건과 망상이 섞인 이야기라든지, 이 모든 일이 실제로 계획됐다든지, 여러 관점에서 봐도 말이 될뿐더러 이 영화를 보는 데 있어서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 짓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중요한 건 보의 내면을 따라간다는 점이다.

언택트 톡에서도 자기 영화가 특정하게 규정되는 걸 원하지 않는지 다양한 관점의 해석을 위해 최대한 직접적인 해설을 해주지 않으려고 하던데 나도 그게 맞다고 생각한다. 감독이 직접 나서서 아 이건 이 뜻이고요, 저건 저 뜻이에요! 하면 얼마나 김새고 우스워지겠음ㅋㅋ
그리고 제일 웃겼던 대화인데 이동진이 영화에서 인물들 머리가 잘리는 장면이 자꾸 나오는 이유가 있냐고 물어보자 해맑게 '그냥 머리 날리는 게 재밌다'고 답변해서 관객들 빵터짐. 아 그치 총 쏘는 게임에서 헤드샷 쏘기 좋아한다고 해서 실제 사람으로 그러지는 않잖아

 

보는 두렵지만 아리는 행복하다구!


+ 요즘이 코로나 이후로 영화관에서 볼만한 영화가 가장 많이 나오는 시기 같다.
스파이더버스는 팬아트 하나 때문에 혹해서 봤는데 너네 양심이 있으면 미겔 오하라 프리퀄 내놔라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개봉 1주일 만에 상영 시간대가 새벽에만 있거나 시청각실만큼 작은 상영관에서 틀어줘서 아쉽지만 집에서나 보게 될 것 같다.
이번주엔 미임파 보러 간다. 개봉 텀이 너무 길어서 전작 내용이 하나도 기억 안 나다 보니 신작 나올 때마다 재탕하고 있다.